
인간은 언제 절망하는가? 단지 고통이 클 때, 괴로움이 깊을 때일까.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은 “고통의 크기보다 더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다”라고 말했다.
“A man who could not see the end of his 'provisional existence' was not able to aim at an ultimate goal in life.” – Viktor E.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1946)
그는 나치 수용소에서의 극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 육체적 한계를 넘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은 그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때임을 이야기한다. 이는 단지 전쟁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수용소 대신, 경제라는 이름의 감옥 안에 갇혀 있기도 하다.
끊임없는 불안정한 노동, 매달 반복되는 적자, 저축은커녕 대출 이자에 눌려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 우리는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른다. 1년 뒤에도, 3년 뒤에도 지금과 같을 것 같다는 예감은, 사람을 천천히 질식시킨다.
물론, 희망은 존재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을 들어봤고, 해준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이 지나치게 멀고 불투명할 때, 우리는 고통보다 희망에 지치게 된다. 이는 ‘희망 고문’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된다.
매일 아침 조심스레 일어난다. 다시 이력서를 내고, 통장을 들여다보며, 어떤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비슷하다. 미로를 도는 쳇바퀴 속의 삶. 그러다 문득, 이렇게 계속 희망을 붙드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묻게 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로 “삶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한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육체가 멀쩡해도 껍데기처럼 살아간다. 이는 우리가 경제적 상황 속에서 느끼는 ‘존재의 무력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출구가 안 보일 때, 진짜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닐지도 모른다. “출구가 있다는 보장 없이도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내적 근육이다.
아주 작고 단순한 행동—물을 마시는 것,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는 것, 글을 쓰는 것—을 반복하는 가운데 인간은 내면의 통제감을 회복한다. 이는 “나는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이다.
미로가 끝나지 않더라도, 나는 내 발로 걷고 있다. 오늘 하루도, 아직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삶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일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 걸어야 한다. 희망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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