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이 말은 우리에게 흔히 좌절이나 체념을 안겨주지만,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 개념과 결합될 때 단순히 도전적인 극복을 넘어선 깊은 수용의 의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위버멘쉬가 모든 것을 억지로 바꾸려 드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불가피한 현실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과 가치가 나약하고 병든 인간을 만들었다고 보았으며, 허무주의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한계를 초월하는 존재, 즉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위버멘쉬의 태도가 단순히 저항하고 부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을 기꺼이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에 기반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현실은 위버멘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억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수용적 의지를 시험하는 장이 됩니다.
1. 허무를 직시하고 긍정하는 용기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허무주의의 심연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의 변수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버멘쉬는 이러한 허무를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고, 심지어 그 자체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나약한 체념이 아니라, "그래, 이것이 나의 운명이다. 나는 이것을 사랑하겠다"는 긍정의 선언과 같습니다. 통제 불가능한 것을 억지로 바꾸려 하기보다, 그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근원적인 수용이죠.
2.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힘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합니다. 질병, 상실, 실패 등 예측 불가능한 역경은 우리를 좌절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이러한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고통 그 자체를 긍정하며 삶을 사랑하는 운명애를 실천합니다. "마음대로 안 된다"는 현실은 위버멘쉬에게 좌절의 이유가 아니라, 삶의 모든 면을 끌어안고 자신을 단련하며 더욱 깊이 있게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는 고통을 억지로 제거하려는 시도 대신, 그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수용의 자세입니다.
3. 끊임없이 자신을 긍정하는 의지
결국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말은 위버멘쉬에게 자기 긍정의 동기가 됩니다. 세상의 한계와 부조리를 인지하고 그것을 억지로 바꾸려다 좌절하는 대신, 그 안에서 나만의 가치를 창조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갈대가 바람에 순응하며 부러지지 않는 것처럼, 위버멘쉬는 세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자신만의 중심을 잡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포용합니다. 이는 억지스러운 저항이 아닌, 모든 것을 끌어안는 깊고도 강력한 수용의 의지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우리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 앞에서 모든 것을 억지로 바꾸려다 지쳐버릴 것인지, 아니면 그 한계와 예측 불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강한 의지로 삶의 모든 것을 긍정할 것인지는 오롯이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는 말은 위버멘쉬에게 보내는, 깊은 수용을 통한 자기 완성의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